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들과 딸 (문단 편집) === 여담 === * [[백일섭]]의 '홍도야 우지마라'와 '아 글씨'라는 대사의 영향으로 드라마 주 시청층이 아니었던 어린애들(2010년대 기준의 30대들) 사이에서도 이것을 따라부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본 적도 없고 내용도 모르지만 그 당시 놀이터나 국민학교(초등학교)에만 봐도 '홍도야 우지마라~ 아 글씨! 오빠가 있다~'라며 따라부르는 애들이 있을 정도다.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사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을 어린애들이 따라부르는 것도 신기할 일이었다. 애들 뿐 아니라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당시 아 글씨 대사는 세간에서도 주목을 받으며 유행을 탔던 대사가 되었다.[* [[백일섭]]이 후에 밝히길 원래 대본에 있던 멘트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PD가 그날 찍을 분량의 마지막이었고, 음주 후 장면이라 리얼리티도 살릴겸 막걸리를 먹자해서 촬영했다고 한다. 본인은 사실 그 노래를 잘 몰랐는데, 술김에 나온 노래에 오히려 애드리브를 넣다보니 대박이 난 케이스.] * 극중 귀남과 후남의 고향은 안개마을로만 불리고 구체적인 지방명이 언급되지는 않는데, 기차역 장면에서 [[소이역]]이 여러번 배경에 나온다. 소이역은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에 있는 [[충북선]]의 역으로 극중 귀남과 후남의 식구들이 별다른 사투리를 쓰지 않지만, 귀남 부모의 경우 "그랬슈~" 하는 [[충청 방언]]을 약하게 구사하는 장면으로 미루어[* 충청방언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충남 방언과 달리 충북 음성, 괴산, 충주 지역은 억양을 제외하면 어휘상으로는 사투리라 할만한 요소가 매우 적다.] 충북 음성군 소이면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소이면의 경우 극중에 지속적으로 비추는 강가와 저수지 낚시터가 있다. * 극 초중반까지 후남과 귀남의 식구들이 서울을 오갈 때 거의 기차를 이용하지만, 극 후반 1976년 무렵이 되면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을 오가는 것으로 묘사된다. 1970년대 산업화가 지속되면서 이전 철도에 비해 열악했던 도로교통이 발전되는 것을 반영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 극중 후남과 귀남의 고3시절 아버지 이만복이 선거운동을 하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극중 귀남이 68학번인 설정하에) 실제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또한 극중 이만복의 이발소 장면에 당시의 군소정당이었던 통한당(통일한국당) 후보의 포스터가 보이는데, 극중 꼭 낙선하는 후보만 따라다니며 선거건달 소리 듣는 이만복의 상황과 꼭 맞는다. * 귀남이 14회 사법시험을 치르는 날, 미현은 영화 '[[러브 스토리]]'를 관람하는데, 러브스토리의 한국개봉일이 1971년 12월이다. 단관개봉 시절 인기영화가 몇달동안 상영하던 것을 감안하면, 사법시험 1차 시험이 치뤄지는 2월까지 상영하던 것. 작가의 시대고증이 의외로 매우 정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 고증이 잘 된 장면은 극 후반에도 또 나오는데, 귀남이 성자와 결혼하기 전 1975년 무렵 영화관람 장면에서 이장호 감독의 "어제 내린 비" (윤형주의 주제가로도 유명한 영화)가 나온다. 실제로 "어제 내린 비"의 개봉연도가 1975년이다. * 극중 배경이 되는 요소들을 종합해보면 후남과 귀남의 출생연도는 1949년으로 추정된다. 극중 25회에서 귀남의 4학년 졸업반 직후 치르는 사법시험이 1972년 제14회 시험이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후남, 귀남의 출생연도는 '''1949년생'''이고 귀남, 규태, 석호, 미현의 학번은 '''68학번'''이다. * 극중 학교명이 언급되지는 않으나, 자취방이 명륜동이며 전기모집에 불합격해서 후기에 입학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성균관대 법대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성대 법대는 후기 대학 중에서 점수가 제일 높았다.[* 중앙일보의 "76년도 대학신입생 대학별 학과별 예시성적" 기사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사회 283.21점, 서울대학교 인문 273.17점, 성균관대학교 법률학 272.27점, 연세대학교 경제 261.78점, 고려대학교 법학 259.12점이었다.] 참고로 1972년 제14회 사법시험에서 성균관대가 합격자 순위 2위를 차지하며 선전했다.[* 참고로 성대법대 출신인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제14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바 있다.][* 당시는 전후기로 모집하던 입시제도였고, 서울대의 위상이 절대적인 시절이었다. 이에 전기 입시에서 [[서울대]]에 지원했다 아깝게 떨어진 고득점자가 성대법대에 입학하면서, 전술된 바와 같이 연고대보다도 높은 예비고사 점수대를 형성하였다. 이에 사법시험에서도 2위를 몇번 차지할 정도의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다만 1980년 이후에는 1개 대학에만 허용했던 지원을 여러 대학에 복수지원토록 하게 바뀌는 등 입시 제도가 변하였고, 성균관대 재단이었던 삼성이 분쟁으로 손을 떼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에 따라 위와 같은 모습은 끝을 맺게 된다.] 극중에선 이때 과동기인 석호는 합격하고 귀남은 떨어져 심하게 좌절한다. * 극중 미현은 숙명여대 전기입시 때 불합격 후(극중 4회중 '67 청파한울제라고 현수막이 걸려있다) 후기입시도 같은 학교 의류학과에 지원하여 합격 후 대학생활을 시작한다.(5회 숙명음악대학 숙연당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귀남의 학교가 성균관대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 성대에 의상학과도 있다. 다만, 극중 귀남, 미현의 학번은 68학번으로 보이는데, 성균관대 의상학과는 1971년에 설치되었다. 극중 남녀공학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미현의 학과생들은 모두 다 여학생들만 보이는데, 실제로 성균관대 의상학과는 당시 가정대 소속으로 (현재는 예술대학 소속) 여학생만 입학을 허용했으며, 남학생의 입학이 허용된 것은 1989년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극중 5회에서 미현 엄마가 미현에게 학교에 적만 두고, 재수를 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미현의 이모가 어차피 같은 전공인데 뭐하러 재수를 하느냐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전공에 전기에도 의류/의상학과를 지원했다면, 미현이 전기에 지원했을만한 대학은 서울대학교나 연세대학교 또는 이화여대일 가능성이 높다.] * 극중 주인공들이 대학 2학년 즈음되는 시기에 미현이 석호에게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공연을 가자고 하는 에피가 나오는데, 실제로 내한공연이 1969년이었다. 주인공들의 학번인 68학번과 시기가 일치한다. * 극중 13화에서 귀남이 자취방 연탄가스 중독으로 앓아 눕는 에피소드 즈음 대학교들이 휴강하여 수업이 없는 것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통해 임기를 연장하려는 데 반대하는 데모가 극심했던 시기를 그린다. 1969년 2학기 대학가는 3선 개헌 반대 데모로 대구모 휴강사태가 벌어졌으며, 이는 2년 후 1971년 교련반대 시위와 대규모 휴강사태로 이어진다. * 귀남이 사법시험 준비중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김민기, 양희은의 '[[아침 이슬]]'을 부르는 장면도 나오는데, 아침 이슬이 수록된 김민기 1집의 발표시기 1971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 귀남의 1972년 14회 사법시험 응시직후 2월경 후남이 신문광고에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방송통신대학]]이 설립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응시를 준비하는데, 실제로도 방송통신대는 1972년 2월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2년제 초급대학 과정. 후에 학사학위 과정으로 승격. 설립당시의 방통대는 무려 '''[[서울대학교]] 부설'''이었다. 후에 (방통대 특성상) 5년제 학사과정의 대학으로 독립하고, 92년부터 4년제 학사과정으로 개편된다.) * 극중 귀남의 졸업식 에피소드에서 규태는 [[학생군사교육단|ROTC]]를 마치고 임관을 앞두고 있었는데, 귀남 아버지에게 [[육군보병학교|광주 보병학교]]에 입교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후 귀남과 미현의 면회 장면에서 규태는 전차부대의 전차장이었다. 전차부대로 임관하려면 보병학교가 아닌 [[육군기계화학교|기갑학교]]를 수료했을텐데... 아마 방송화면에서 볼거리 측면에서 화려하게 보이고 싶었던 연출상의 오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귀남과 미현이 규태의 면회를 간 장면에서 보이는 부대명은 강원도 인제의 육군 제 3005부대인데, 전차부대가 아니라 1군지사 산하의 정비대이다. * 극중 귀남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68년~71년 사이인데, 귀남과 규태가 자취방에 놀러온 미현을 바래다주러 미현집에 갔다 저녁식사를 얻어먹는 장면에서 귀남과 규태가 [[카레라이스]]를 처음 접하고 잘 못 먹는 장면이 나온다. 서울과 시골의 생활상 차이가 지금보다 컸던 그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 규태는 억지로라도 먹지만, 귀남은 아예 못먹는데, 남자가 까다롭게 군다며 미현에게 구박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실제 한국에 카레라이스가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이지만, 본격적으로 가정화,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9년 [[오뚜기|오뚜기카레]]의 출시' ''' 이후이다. 그 이전까지는 S&B카레 등 일제 수입카레가 있었지만, 일부 대도시 수입상품점 등에서나 유통되었으므로 시골출신 귀남과 규태가 카레라이스를 처음 먹는다는 설정은 나름 고증이 잘 된 장면. * 극중 귀남의 고향집에는 TV가 없어 귀남의 누나 소영이네는 성자네 집으로 마실가서 TV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TV가 매우 비싸 보급률이 낮았던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극의 주된 배경이 되는 '''70년대 초 가구당 TV 보급률이 6% 대'''에 머물던 시기였다. 이후 75년도 즈음에 가서도 가구당 30% 정도인데, 극중 서울 등 도심보다 생활수준이 열악했던 시골의 사정을 감안하면 꼼꼼한 고증이라고 볼 수 있다. *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로 당시의 일상사나 물가 등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꽤 있는데, 후남의 형부가 돼지고기를 사가는 장면에서 가격이 '''1근(600g) 220원'''이다. 13화에서 귀남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앓아 누웠을 때, 귀남모가 간병을 위해 상경하여 밥을 해주면서 무슨 소고기를 '''1근(600g)에 400원'''씩이나 받느냐고 투덜대는 장면도 나온다. 또한 미현의 집 담벼락에 [[식모]] 모집 전단이 붙어있는데, 식모 인건비가 숙식 포함 '''월 5,500원'''으로 나온다.[* 당시 농협같은 직장도 대졸신입 월급이 수당 등을 합쳐 4만원 안팍이던 시기.] * 미현이 졸업전에 교수님들 모시고 사은회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은회야 지금도 하는 것이지만 여학생들이 정장이 아닌 한복을 입고 치른다. 한복의 착용빈도가 지금보다 많았던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지금은 결혼식에서도 양가 어머니나 결혼한 여자형제 정도만 한복을 입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친척 어르신들이나 일반 하객중에도 여자들의 경우 정장 대신 한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 극중 후남과 미현이 20대 중반을 넘겼을 즈음, 미현의 이모부와 저녁을 함께하는 장면에서 미현이 후남에게 "너 술 마셔본 적 없지 ?" 하며 작가라면 술도 마셔봐야 한다며 권하고 후남은 처음 술을 마셔보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의 보수적인 시대상을 반영하는 장면인데, 당시 대학을 다녔던 미현의 경우 술을 마셔봤지만, 대학생활을 뒤늦게 만학도로 시작한 후남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것.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신입생이 되면 여자도 쉽게 술자리를 접하게 되는 지금에서야 상상하기 힘들지만, 실제로 70년대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자란 여자들이 술을 배우게 되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이는 이후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여성음주도 남자와 별 차이가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극중 여자인데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미현모도 당시 기준으로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를 행동이었던 시절. * 극의 연출 측면에서 당시의 의상도 어느 정도는 시대별로 유행이 변천하는 것이 반영되는데, 극중 귀남의 대학 저학년 시절에는 헤어스타일도 짧은 머리로 나오다 70년대로 접어들면서 4학년 졸업반 시절에는 장발로 변한다. 아울러 미현과 성자도 그 즈음부터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온다. * 1990년대 초반 MBC 드라마들의 보존 상태가 유난히 좋지 않은 편인데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작품 중 하나다. 음성트랙에 문제가 생겨서 방영 중 경고가 뜨는 편수가 있을 정도. [각주] [[분류:MBC 주말 드라마]][[분류:1992년 드라마]][[분류:1993년 드라마]][[분류:1993년 종영]][[분류:한국 사극]][[분류:대한민국(20세기)/창작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